마을탐방
누구에게나 쉼표 같은 동백마을
소소한 선물, 신흥2리 동백마을
시끄러운 경적, 무채색의 건물, 무료한 일상의 반복. 도시 속의 삶은 편리하지만 가슴 속 어딘가에 답답함을 쌓아 올린다. 그것이 높게 쌓여 마음을 짓누를 때쯤 우리는 자연스레 ‘여행’을 떠올린다.
특히 코로나 이후 ‘코로나블루’라는 신조어가 탄생할 정도로 우리 일상에 찾아온 ‘단절’이라는 큰 변화에 우울감이나 무기력한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가는 요즘 시대에 여행은 어두운 마음을 다시금 밝은색으로 칠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흥2리 동백마을’은 보물 같은 존재이다. 광활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소소한 분위기 속 정감 넘치는 만남이 있는 곳. 우리는 이곳에서 도시 속 삶에서 쌓인 무거운 짐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만약 도시 속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면, 이제는 바라볼 차례다.
그리고 떠나볼 차례다. ‘신흥2리 동백마을’로.
소소한 마을
‘동백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출발점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북적거리는 곳보다는 조용한, 화려한 곳보다는 소소한 마을을 찾고 있었던 나에게 ‘신흥2리 동백마을’은 최적의 선택지였다. 관광객들을 위해 여러 조형물이 세워지고 벽화가 칠해진 전형적인 관광 마을과는 거리가 멀었던 신흥2리 마을은 첫인상부터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을 한편에 자리한 작은 카페 겸 음식점 모드커피를 지나 가장 먼저 닿게 된 곳은 동백마을 방문자센터였다. 초행길이었던 터라 마을에 대한 간략한 안내가 필요했던 나는 방문자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섰고, 기분 좋은 환영 인사가 들려왔다. 방문자센터의 담당자인 최혜연 동백고장보전연구회 사무국장은 나에게 팸플릿 한 장을 건네며 마을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우리 마을은 소소하지만 정감 넘치는 마을이에요.”
방문자센터를 나와 천천히 거닐며 마주하게 된 신흥2리 동백마을은 최혜연 사무국장의 말처럼 소소하지만 곳곳에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마을이었다.
신흥2리 동백마을은 감귤 농사를 주로 짓는 마을이었는데, 때마침 감귤이 익어가는 시기가 다가와 마을 곳곳은 눈길을 사로잡는 주황빛 감귤로 가득해 더욱 아름다웠다.
따뜻한 치유
신흥2리 마을은 나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예년보다 날씨가 빠르게 추워진 탓인지 꽃망울을 조금 일찍 터뜨리기 시작한 붉은 동백꽃이 곳곳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화려한 꽃잎의 아기동백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자원이 되어주는 붉은빛 토종동백까지. 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힘차게 꽃을 피우는 동백은 도시에 살며 점차 무채색으로 옅어지던 마음을 정열적인 색으로 물들이며 ‘따뜻한 치유’를 안겨주었다.
1년 중 이 시기에만 만날 수 있는 동백들을 따라 거니는 여정은 나를 마을의 깊숙한 곳까지 안내했다.
그곳에는 인위적인 관광지는 뿜어낼 수 없는, 실제 삶 속에서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평온함이 가득했다. 나는 그렇게 그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혼잡했던 마음을 점차 안정시켜갔다.
“반가워”
“꼭 우리 손주를 보는 것 같네”. 마을 어귀를 거닐던 나를 발견한 마을 주민 할머니가 말을 건네오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가벼운 인사로 화답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감귤 하나를 나에게 쥐여주셨다. 작은 감귤 하나였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온정은 각박한 삶을 살아오던 내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다. 신흥2리 마을은 곳곳이 그러했다. 간혹 마주치는 주민들은 반가운 미소로 인사를 건네왔고, 강아지들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이곳을 여행하는 이방인인 나를 반겼다.
고양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길가에 마련된 벤치에 앉자 등 뒤에 늘어선 돌담 위로 고양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불편한 정도의 거리로 다가오지도, 굳이 말을 걸지도 않았지만 홀로 여행하는 나에게 좋은 친구이자 소소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고양이들과 함께 일몰 풍경을 기다리며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기억에 남을 행복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나는 벤치에서 일어서 해가 내려앉는 방향인 노인회관 운동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너른 운동장에는 은은한 주황빛이 우수같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하늘은 분홍색과 구름이 뒤섞여 로맨틱한 분위기를 선사했다. 평소였다면 바닥난 체력으로 인해 금세 발걸음을 돌렸겠지만, 마을을 거닐며 얻은 온정은 나를 절로 움직이게 했다.
나는 돌담과 감귤밭 너머로 한라산이 한눈에 보이는 곳까지 걷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 감귤은 노을빛을 머금어 더욱 빛나며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침내 버스정류장 옆 감귤밭에 다다랐을 때, 나는 생각하게 됐다. 인생이 책으로 적힌다면 지친 나날의 페이지 위에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신흥2리 동백마을’이라는 책갈피가 끼워져 있을 것이라고. 또다시 도시의 삶에 치이는 순간이 다가온다면 나는 이 순간이 담긴 책장을 펴볼 것이다. 그곳에 끼워진 신흥2리 마을 속 행복한 장면이 분명 지친 나를 위로해 줄 테니.